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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면서/영성

지식인의 역할은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 - 리영희

비아루까 2015. 1. 28. 10:31

 

 이와 같은 하나의 낱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나는 깊이 생각하고,

또 그 타당성 여부를 여러모로 검증하면서 언론인 생활을 했어.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한국 언론계는 물론 지식인 전반과 국민들이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적 고찰을 거치지 않은 채

'북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인해,

극우·반공적 독재정권의 왜곡된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를테면 부패 타락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놓고, 마치 '세종대왕의 재현'이니 또는 '민주주의'라고 표현하고 착각한 것이라든가,

한국 사회의 온갖 도덕적 타락과 윤리적 파괴를 두고 이를 무슨 정상적 사회생활이나 행복과 발전으로 착각한다든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반공 성전'이나 '민주주의와 자유의 전쟁'이라고 칭하고,

세계를 오로지 자본주의(선)와 공산주의(악)의 종말론적 대결로만 착각하는 것과 같은 모든 도착된 인식이

낱말을 정확하게 쓰지 못하는 까닭에 일어나는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

 

  공자의 『논어「정언」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검다고 해야 하고, 악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칭해야 하고,

사슴은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불러야 하고, 말은 사슴이 아니라 말이라고 칭해야 하고……,

이처럼 모든 형태나 관계나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

이런 사실은 서양의 경우에도, 그 유명한 구약성서의 바벨탑 우화에 잘 표현돼 있어요.

사람들이 분수를 모르고 하늘나라를 넘보면서 바벨탑을 쌓아 올라갈 때,

신이 건방진 인간들의 행위를 꾸짖기 위해 말(언어)의 혼란을 일으켜서 결국 다 멸망한다는 우와가 있지 않아요?

이것이 동양에서는 공자의 '정언론'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제반 속성을 진실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인식하는 주체의 사고가 정확할 수가 있다는 교훈이지요.

바로 이런 교훈을 나는 남한의 언론과 지식인과 국민 전반에게 적용해야 하고,

또한 지식인으로서의 기능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화, 리영희, 37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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