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뒷곁에 있던 아기 목련 봉오리
아 ! 귀여워 !!
무엇이든 아기들은 솜털이 보송보송한가보다.
심긴 지 한 해만 지난 터라
올해는 한 뼘 키가 더 크도록 그냥 두려고 했는데
며칠 전 흰꽃봉오리들을 보는 순간 그만 ...
하지만 단순히 욕심에 의한 충동의 결과는 아니다.
순간 내겐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 나무에서 제 생을 마치는 게 좋을까,
꽃차로 다시 태어나는 게 좋을까, 꽃에겐...? "
아마도 다시 태어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찰나의 마음 읽기였을까?
나무에서 데려온 아기 봉오리들을 아주 섬세하고 부드럽게 매만진다.
떠나온 곳이 그립고, 이 자리가 낯설지도 모른다.
가지런히 앉히고 자신의 시간들 갖도록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흘러
꽃이 자신을 "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스스로 물기를 날려 보내면
아기 봉오리는 어느 새 성숙한 여인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된다.
꽃송이들은 각각 제 자리를 부여받는다. 서로 부딪쳐 상처나지 않도록...
작다고 얕보이지 않고, 크다고 힘자랑 할 수도 없다.
모두가 온전한 한송이 꽃이다.
그 모양 그대로 익어가는 것이다.
이제 저마다 스스로 설 수 있다.
다른 꽃송이가 곁에 와 부딪쳐도, 혹 그 위해 포개져도 상처나지 않는다.
덖이고 식혀지는 인고의 시간을 지나 새로 태어났으므로...
자매에게 물었다.
"꽃은 어느 것을 더 좋아할까?
나무에서 제 생을 마치는 것을 좋아할까, 아니면 꽃차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좋아할까?"
자매가 대답했다.
" 두 가지 다 이겠지."
두 가지 다
한껏 자기 삶을 살다 가는 것일까?
예수님은 요절하셨고
나는 그분 삶과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꽃을 나무에 그대로 두어야 할 지 데려와야 할 지 모르겠고...
성 금요일에, 꽃에서 우리를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