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9일 수요일
원로 선배님들 일곱 분을 모시고 나들이 길에 올랐다.
한양 천리... 5시간...
굽은 허리, 꺾이는 다리, 차에 오를 땐 받쳐 드리고 내릴 땐 잡아 드리고...
요즘은 '느림이 미학'이라 하지만, 왠지 안스러운 걸음걸이...
너나 할 것 없이
한양 구경하러 '올라가는' 이들에게 필수는 아마도 경복궁일 게다.
복잡한 시내 한 가운데에 자리한 궁.
광화문쪽이 아니라 측면에서 입장해 거꾸로 걸어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궁 안에 들어가자마자
어떤 분은 일행과 멀어지는 줄도 모른 채 도토리 줍느라 정신 줄 놓고,
어떤 분은 시작도 전에 나무그늘 아래서 기다리겠노라 하고,
어떤 분은 언제 나가냐 하고...
예상했던 상황인 터라
그래도 남는 건 사진 뿐이니까 청와대 앞에서 사진 한장만 찍고 각자 원하시는 대로 하자고 꾀를 냈다.
가까스로 청와대 앞 포토존으로 모시고 왔다갔다 하는데,
어떤 체격 좋은 아저씨가 성큼성큼 우리에게 다가 와서
"궁금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뭐든 물어보세요. 제가 잘 설명해 드릴께요." 한다.
하지만 어르신들 서로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는데
속으로 "뭐, 아는 게 있어야 묻지? 몰라도 되는데... 우리 그냥 걸어서 나갈 건데..."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분이 또 다가와 "저 빈첸시오입니다."하는 순간, 어르신들 모두 눈이 반들거리고 입가엔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그분은 우리의 (자칭)선생님이 되었다. 아는 게 없어서 물을 게 없던 학생들이 "아~ 오~..."하고 연신 감탄하게끔 설명을 하는데, 이제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선생님을 따라다녀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입장 때와는 영~ 달리 점점 회춘하는 듯, 다리는 여전히 비틀거려도 얼굴에는 생기가 더 해 갔다. 그런데 사실, 학생들보다 선생님이 더 신이 났다. 자신의 설명을 우리처럼 이렇게 열심히 알아듣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어쨌든 어르신들은 초반의 태도와는 영~ 다른 자세로, 생각지도 못한 경회루 마루까지 밟아 보고(선생님이 이야기 하면 무사 통과!)
"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퇴장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샅샅이 따라 다녔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고고학 교수였고, 우리 나라 문화재 관리를 위해 영국에서 일시 입국해 있는 중이라고 한다.
1년에 두세번 궁에 다니러 오는데 그 중 하루가 바로 우리가 만난 그 날이었다고.
만일 우리가 광화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리라 했더니,
선생님, " 그래도 우린 꼭 만났을 겁니다. 여러분이 젊은 분들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언제 또 여기 오시겠어요? 그래서 제가 시간이 없음에도 굳이 모시고 다닌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면서 얼마나 치유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다.
우리는 '믿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데, 우리보다 더 한 믿음을 보이다니...
그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막연한 신앙이기보다
느림의 시간을 살고 있는 어르신들에 대한 애잔한 기도가 머금은 믿음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저녁거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칼국수집까지 안내하고 동행해 주었다.
사실 그 늦은 시간에 서울 그 복잡한 한 가운데서 어디를 찾아갈 수 있었겠나... 쫄쫄거릴 수밖에...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난다고 한다.
그건 특별한 '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어르신들, 그동안 짧지 않은 생, 온전히 성실히 살아오셨으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선생님도, 나도 믿지 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원로 선배님들 모시고 나선 탓에 수호천사 덕을 톡톡히 보고, 다이도르핀이 팡팡 솟는 감사로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