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르는 두 단계(엠마오의 제자들 안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장면에는 열렬함과 진솔함이 가득하다.
이 장면은 부활 이전의 따름과 부활 이후의 따름이라는 따름의 두 모델을 보여 준다.
부활 이전의 따름은 불신앙, 걸림돌, 포기와 절망으로 끝난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공동체를 유지시켰던 예수가 사라지고 나자,
‘외부로의 유출’이 일어난다. 저마다 자신이 하던 일로 되돌아간다.
제자들의 몰이해(구원의 신비를 깨닫지 못함)는 부활 이전의 ‘따름’이 지닌 전형적 특성이다.
엠마오 이야기의 후반부는, 예수를 따르는 둘째 단계의 출발점이 된다.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게 된 다음, 그 장면의 리듬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이제 리듬은 빨라지고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간다.
흩어짐은 불러 모음으로 변화되고, 그들은 공동체로 결합된다.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열정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따름을 시작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부활하신 분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따름의 장소는 또한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
“갈릴래아로 돌아간다.”는 것은 예수의 역사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새로운 삶의 원칙과 의미로 삼는 것을 뜻한다.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이들의 갈릴래아다.
전통과 종교 제도의 무게에 눌리지 않는 곳, 변두리, 유다교의 변방이다.
갈릴래아에서 구원은 은총과 자비를 통해서만 기대할 수 있었다.
바로 그곳이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
예루살렘에는 오직 빈 무덤이 있을 뿐이다.
그곳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마지막 가능성을 거부한 장소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이라는 이중의 상징은
부활 체험과 따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활신앙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정확한 장소에 가 있어야 한다.
그 장소가 갈릴래아다.
각 공동체에게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갈릴래아를 말하는 것이다.
갈릴래아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자신의 기대와 종교 전통을 인정하는 메시아 외에 다른 메시아는 바라지 않는 예루살렘이 아닌 것이다.
수도생활의 재발견 / 펠리시시모 마르티네스 디에스 OP / 안소근 옮김/ 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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