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영성으로 통합하는 것으로서 신비
성을 영성으로 통합하는 것으로서 신비
사랑의 집 103-109〉 안셀름 그린. 성바오로.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숨결만으로도 충분한 사랑을 전달받는 경우가 많다. 그는 함께 숨만 쉬고 있어도 사랑이 상대방 깊숙이 흘러들어가고 서로를 깊이 연결하는 것을 느낀다. 숨을 쉬는 것 안에서 이들은 서로 하나가 된다.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을 의식적으로 주의 깊게 감지하는 사람은-쇨렌바움이 감지의식이라고 한-자기 자신, 사물들,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을 즈이 깊고 섬세하게 대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신비가 드솰랄 데드딘 아르루미(Dschalal ed-din ar-Rumi)는 13세기에 벌써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숨결 속에다 당신 사랑의 향기를 가득 채우시는지를 매우 훌륭하게 서술했다.
지극한 사랑이신 하느님
마치 포도주와 물이 섞이듯이
저의 영혼은 당신의 영혼과 섞여 있나이다.
그 누가 포도주와 물을 갈라놓을 수 있나요?
그 누가 당신과 저를 다시 갈라놓을 수 있나요?
당신은 저의 큰 자아가 되어버렸나이다.
저는 이제 작은 자아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겠나이다.
제가 당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당신 또한 저를 받아들이셨나이다.
저를 꿰뚫고 들어온 당신 사랑의 향기는
저의 뼈와 살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저는 플루트처럼 당신의 입술에 붙어 있으니,
제가 소리를 내도록 당신의 숨결을 주소서.
제 가슴의 호흡이신 하느님,
제가 울음소리를 내도록 저를 쳐주소서.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나도 그 안에 머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5,5)
내 안에 들어오는 숨과 내 안에서 흐르는 피처럼 내 안에 흘러다니는 모든 것은 나의 몸을 가득 채우고, 나를 생기 있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신다.
“여러분은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하느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나 자신을 완전히 숨에 내맡기고 나를 잊어버려서 내가 오직 숨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는 사람과 입맞춤이나 성적으로 하나가 되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강도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한 사람 안에서 그의 사랑을 참으로 느끼는 것은 그의 사랑에 대해 믿음을 가질 때이다. 입맞춤만으로는 아직 사랑이 아니다. 입맞춤은 내가 믿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숨이 사랑과 친밀함이 없는 텅 빈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믿으면, 내가 나의 숨과 완전히 일치하면 나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랑을 붙들어둘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노력을 해도 이 사랑을 못 느낀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불안정함에 머물고 만다. 이럴 경우에는 나의 동경에 대해 믿음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 비록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 사랑을 깊이 동경하고 있음을 나 스스로 알고 있으면, 즉 이 동경에 대해 느낌을 가지면, 내 안에 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느낌도 다시 떠오르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에 나를 완전히 묶어둘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처럼 그렇게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은 안다. 우정이나 혼인생활 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사랑을 매우 강하게 체험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사랑이 얼마나 빠르게 냉담, 권태, 짜증, 소유욕, 속박, 서로 상처를 주는 일 등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인간적인 사랑을 혹시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할 것 없이 그것을 즐기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신적 사랑에 대한 체험은 나를 인간적인 사랑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게 하여 자유롭게 한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에만 둘 사이의 사랑도 성립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은 우리가 그위에 인간적인 사랑을 건설해나갈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 된다. 남녀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존재함을 알려주고, 사람끼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혼인성사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 성립할 수 있는 바탕이고 지속하게 하는 버팀목이다.
호흡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몸동작과 자세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동작과 자세로도 표현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두 팔로 감싸안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며 입을 맞추기도 한다. 기도할 때 취하는 자세들은 인간적인 사랑에서 취하는 자세와 비슷한 형태를 띤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는 십자가의 자세가 사랑을 표현하는 자세이다.
나에게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그분의 자세를 묵상하다 보면, 마치 그분의 두 팔에 안긴 듯한 느낌을 갖는다. 두 팔을 펼치면 내 안으로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고, 마치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담는 그릇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내 안에 참으로 많은 사랑이 들어 있고, 그 사랑은 나에게서 밖으로 흘러나갈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나는 결코 빈약해지지 않는 것을 감지한다.
십자가의 자세와 비슷한 또 하나의 자세는 두 팔을 가슴위에 교차시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이런 자세는 자주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두는 것으로 표현된다.
영적 삶은 내면의 불을 보호하는 것에서 성립한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화로의 공기통을 열어놓아 완전히 다 타버리게 한다. 나는 가슴 위에 교차시킨 두 팔로 내 가슴의 문을 닫아둔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도 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나는 하느님과 홀로 있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내 몸 안에 퍼져 있는 하느님의 사랑인 내면의 불을 보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