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한 바탕 일을 마치고 나면
내 마음은 그대로 널부러진다.
일단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상태가 된다.
어제는 여덟 분의 수녀님들에게 에니어그램 강의를 해 주었다.
국지성 폭우라고 하던가...
다른 곳에 볼 일을 마치고 이동하는 중에
비가 그야말로 양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졌다.
비상등을 켜고 자동차 창문닦이를 최고속으로 해도
빗속을 뚫고 나간다는 것이 위험천만할 지경이었다.
빗줄기가 좀 잦아들 때까지 휴게소에서 잠시 기다릴까 생각도 했지만
장대비에 어둠까지 합세하면 그야말로 옴짝달싹 못할 형편이 될지도 모르니
가던 길을 계속 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목적지 가까이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빗줄기가 엷어졌다. 다행이다.
얼른 목적지에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때는 내가 몹시 피곤한 표시다.
웬만해서는 운전하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 고생을 하며 다니는가? (사실, 고생도 아니지만 ...)
이유는 단 하나, 도울 수 있는 한 돕자, 내가 할 수 있는 한 하자, 기회가 되는 한 거절하지 말자.
조건 없이 오직 '나를 내어놓는 것'에 마음을 던지자!!
작업을 마친 수녀님들이 하나같이 감사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자신을 찾아가는 내적 여행을 더 성실히 하겠노라면서...
자동차에 짐을 꾸리면서는 '고달픔'이 온 몸을 휩싸고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야 한다.
다행히 돌아오는 길엔 비님이 사브작거리며 가늘게 내려앉고 있었다.
위로받는 것 같았다.
속도를 늦췄다.
자동차들은 물 가르는 소리를 뿌리며 앞질러 갔다.
라디오를 틀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 조용하게 흐르는 선율...
운무에 휘감긴 산들이 뒷걸음질을 한다. 아주 느리다.
산들의 걸음에 나의 모든 것이 발을 맞춘다. 속이 점점 비어져간다.
아무 것도 없다. 진공상태 같다.
목적지가 없었으면 ...